엊그제인가, 돌아오는 길에 친구가 말하길, 이제 우리는 여름의 시작점에 있다고 했다. 그래서 이젠 더운 바람이 불고, 장마 비가 내리기 시작할 것이라고.
하루 종일 더운 비가 내리는 것을 보니, 이제 정말 여름이 오는가 보다.
지난 여름에는 너무 더워서 가스불을 켜지 못하고 비빔라면과 국수만 먹었던 기억이 있다. 불을 많이 쓰지 않아도 금세 만들 수 있어서 어머니의 수고로움이 덜했던 이유다. 여름엔 특히 국수를 많이 먹게 되는듯하다.
생각해 보면 국수의 범위가 꽤 넓다. 라면과 짜장면 같은 음식도 국수에 포함된다. 영화에서도 짜장면이나 라면을 먹는 장면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고, 주인공이 맛깔나게 면치기를 하는 모습을 보면 그날 저녁 식사는 자연스럽게 라면으로 정해지기도 한다.
결혼식 같은 잔치에서도 항상 국수가 빠지지 않는다. 이런 것을 보면 ' 한국인들은 정말 국수를 좋아하는군.' 하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다. 우리의 국수 사랑은 어디에서 시작되었을까. 옛사람들의 국수 이야기를 잠깐 해볼까 한다.
잔치국수라는 이름에서 쉽게 유추할 수 있듯이 예로부터 국수는 귀한 잔치 음식이었다.
1123년 고려를 방문한 송나라 사신 서긍은 그의 기록 《고려도경》에서
“고려에는 밀 생산이 적어 대부분 중국 산둥성에서 수입한다. 그래서 국수 값이 비싸고 큰 잔치가 아니면 쓰지 않는다.”라고 말한 바 있다.
그만큼 고려에서 국수는 흔히 먹을 수 없는 귀한 음식이었다.
외국 사신을 대접하는 자리에서도 국수는 빠지지 않았다. 사신이 고려 경내에 들어오면 여러 지역에서 음식을 준비해 대접해야 했는데 그때 첫 번째로 올린 음식이 국수였다. 금과 은으로 그릇을 만들고 옻칠한 쟁반에 담아 정성껏 올렸다고 하니 고려시대 국수가 얼마나 귀했는지 드러나는 부분이다.
고려시대 국수의 구체적인 조리법은 전해지지 않지만, 조선 초기의 조리서 《산가요록》에 ‘멸법(麫法, 국수 만드는 방법)’이 소개되어 있다.
차조 가루와 메밀가루를 같은 비율로 섞어 국수를 만들거나, 물에 오래 담가 삭힌 차조 가루에 녹두가루를 섞어 만들기도 했으며,
메밀가루에 느릅나무 가루를 섞거나, 밀가루와 콩가루를 섞어 만들기도 했다.
이때부터 콩국수가 있었다는 사실이 놀라웠는데, 콩가루 2에 밀가루 1 비율로 섞어 ‘콩국수’를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고려시대에도 국수의 재료가 아주 다양했다. 차조, 메밀, 콩, 녹두, 이름도 생소한 느릅나무까지 가루로 만들어 다양한 방식으로 면을 뽑았다고 하니 어쩌면 지금보다 재료의 폭이 넓었을지도 모른다..
고려 말기 유학자 목은 이색은 점심으로 먹은 국수에 대한 시를 썼다.《목은시고》에 수록된 '오찬'이라는 시인데, 그는 여름날에 점심으로 먹은 '백면(白麪)'을 이렇게 묘사했다.
흰 국수는 향기로운 육수에 미끄럽고 / 쇠한 창자엔 찬 기운이 서리어라
찬 오이채는 조금씩 먹기 알맞고 / 연한 부추 잎은 또 살짝 데쳐졌네
흰 국수, 차가운 육수, 오이채, 부추 지금의 냉면과도 비슷한 느낌이다.
목은은 이 음식을 먹으며 '맹광'(중국 고사의 어진 아내)을 떠올렸다. 그의 아내가 정성껏 준비해 준 백면에 대한 고마움을 이렇게 표현한 것이렸다. 이 시대 사람들은 중국 고사의 인물들을 빌려와 칭찬하는 것을 멋스럽다고 생각했는가 보다.
여기서 '백면'은 밀가루 국수일 수도 있지만 쌀가루로 만든 국수였을 가능성도 있다고 한다. 조선후기 《윤 씨 조리법》에 쌀가루로 만든 흰떡국수가 등장하고 냉면 역시 물김치 국물에 말아먹는 방식이 소개되기 때문이다.
국수의 주재료인 밀가루는 과거에 아주 구하기 힘든 귀한 재료였다고 한다. 그래서 고려시대에도 국수는 특별한 날이나, 귀한 손님이 왔을 때에 대접하는 용도였다. 차조, 메밀, 콩, 녹두 등 다양한 재료가 쓰였고, 백면이나 냉면 같은 차가운 국수도 존재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지금 우리가 먹는 메밀국수, 냉면, 콩국수 등은 어쩌면 고려시대 국수문화가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요즘은 잔치를 벌일 만큼 좋은 일이 있으면 국수보다는 치킨을 시켜 먹는 문화인듯하다. 그래서인지 치킨에는 왠지 모를 설렘과 행복이 담겨있는 것 같다. 특별한 일이 없는데도 치킨을 시켜 먹을 때면 왠지 특별한 기분이 드는 것도 그런 연유일 테다.
음식에는 기억과 추억이 담긴다. 과거의 사람들도 비슷하지 않았을까. 잔칫날에만 먹는 국수에 대해 특별하고 설레는 감정을 담아 먹었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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