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녹음이 짙어지고 사방 천지 꽃내임 풀내음으로 정신이 혼미합니다. 툇마루에 노란 송화가루가 뿌옇게 내려앉아 손으로 쓱쓱 닦고 앉노라니 새삼 오월이 왔음을 느낍니다. 산길을 지날 때면 아카시아 향이 향수를 뿌린 듯 진하게 온몸을 감싸옵니다.
우리 초연당 오천년 정원에는 다양한 야생화와 나무들에 순이 나고 꽃이 피고 지고 또 피어나고 있습니다. 이러한 아름다운 순간들을 남기기 위해 연신 핸드폰 카메라 버튼을 누루고 있습니다. ^^ 요즘이야 스마트폰이나 카메라가 흔해서 맘만 먹으면 간단하게 순간을 있는 그대로 남길 수 있지만 옛사람들은 붓과 먹으로 화가의 손을 빌어 화폭에 남겼습니다.
이런 정물이나 풍경을 잘 그린 옛 화가 중에 저는 신사임당이 제일 먼저 떠오르네요.
인터넷 서핑보다 도서관 자료를 찾아보는 편이 나을 것 같아 근처 도서관에 들러 표지부터 단아한 느낌을 풍기는 [사임당의 뜰]이란 책을 발견하고 냉큼 대출해 왔습니다. 이 책은 제목과 어울리게 사임당의 화첩 가운데 초충화를 중점으로 엮었습니다. 저자의 해설로 작품을 더 맛깔스럽게 감상할 수 있었습니다. 동양화 1도 모르는 사람이 좀 교양이 한 레벨 상승 한 듯 뿌듯 뿌듯합니다.
화가 신사임당
신사임당! 율곡 이이의 어머니로서 또 조선 최초의 여성 예술가로 시인, 작가, 화가이며 2009년에 발행된 오만 원짜리 지폐에 새겨진 위인, 그리고 그녀의 작품 묵포도. 이 정도 소개만으로도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모르는 이가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오만 원권 지폐 '묵포도'가 채색되어 있다는 말에 오만원권 지폐를 얼른 꺼내 보았습니다. 저자의 말처럼 원래 수묵의 느낌을 살렸더라면 더 좋았지 않았을까 아쉽네요.
신사임당은 조선시대 유교사회에서 여상상에 만족하지 않고 독립된 인간으로서의 생활을 스스로 개척한 여성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천부적인 재능과 좋은 환경이 있었기에 훌륭한 예술인이 될 수 있었겠지만 스스로 교양과 학문을 갈고닦지 않았다면 이런 훌륭한 작품을 남길 수는 없었을 거예요. 신사임당은 통찰력과 판단력이 뛰어나고 예민하고 섬세한 감수성이 풍부한 예술가로의 특성을 지닌 조선 최초의 여성 예술가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뜰에 들어서며
앞뜰과 뒤뜰엔 철마다 화초가 피고 꽃향기와 풀향기를 따라 여러 곤충이 찾아오니 산수 간에 사는 즐거움은 아름다운 풀과 벌레로 더욱 커진다.
산은 멈춰 있고 물은 움직이며,
풀은 흔들리고 벌레는 움직인다.
산수는 크고 풀과 벌레는 작은데
이 모든 것은 사람과 더불어 하나가 되며,
이때 사람의 기운이 자라난다.
위 글은 사임당의 화첩에 앞서 머리말 같은데요. 저자의 수려한 글귀가 멋집니다. 화첩을 들쳐 보기도 전에 글귀에 사로잡히고 마네요.
뜰은 마당으로 들어온
작은 산수이다.
이 책에는 신사임당의 여러 그림 작품과 몇점의 이매창의 그림이 실려 있습니다. 두 모녀의 화폭이 펼쳐 놓은 앞뜰과 뒷동산의 정경이 아름답게 담겨 있습니다.
신사임당의 화첩에는 식물들을 화려한 색으로 표현한 그림들이 많이 실려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수묵화는 전해져 내려오지 않아 실려 있지 않네요. 반면 딸 매창의 작품으로 먹으로만 그린 수묵화가 실려 있습니다. 본래 조선시대에서는 사군자를 비롯하여 수묵화는 선비가 그리는 남성그림이었는데 이매창이 대부분 수묵화를 여럿 남겼다고 합니다. 이매창은 어머니의 예술적인 기질을 그대로 물려받은 딸이었나 봅니다. 엄마와 딸이 나란히 앉아 그림을 그렸을 모녀의 모습을 상상해 봅니다.
사임당의 뜰(한그라픽스)
사임당의 뜰에는 무엇이 숨겨져 있을까
『사임당의 뜰』을 통해 간송미술관 연구원 탁현규 저자는 오감으로 사임당 화첩 속 생명들을 느껴보라고 합니다. 이 책은 어머니 사임당보다는 화가이자 예술가로의 사임당에 초점을 맞춘 화첩 속 그림을 전하는 책입니다. 신사임당의 작품들 중 대표적인 '초충도'는 이름 그대로 뜰에 사는 풀과 벌레를 소재로 한 그림입니다.
오감은 색(色) 성(聲) 향(香) 미(味) 촉(觸),
즉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만지는 것.
사임당 뜰에서 우리는
오감이 활짝 열리는 경험을 할 것이다.
첫 작품으로 소개된 '묵포도'.
저자의 말에 따르면 포도를 그려 처음으로 이름을 낸 화가가 사임당이라고 합니다.
조선 시대에 군자가 되는 것이
선비의 바람이라면,
자식을 많이 낳은 것은
부인의 바람이었을지 모른다.
포도의 덩굴줄기는 자손이 끊이지 않고 이어지는 것을 뜻하고, 알알이 맺힌 알맹이는 자식을 많이 낳는다 하여 다산을 뜻한다고 합니다. 묵포도는 사임담 덕분에 후배 화가들, 선비 들고 즐겨 그리는 아이템이 되었다고 하네요.
묵포도는 수묵화가 제맛이라는 말의 뜻을 알 것 같습니다. 포도의 알맹이를 깊고 옅음의 농담으로 표현해 단조롭지 않고 입체적입니다. 줄기와 가지 역시 농담을 달리 표현하여 생동감이 있습니다. 오래된 줄기는 옅게, 새로 난 가지는 파릇파릇 짙게 표현했고 커다란 포도송이를 큰 잎이 거의 가릴 정도로 표현해 다 드러내지 않고 감춰 그림의 번잡함을 피했습니다. 동양화에 조예가 없지만 요런 그림을 화선지가 아닌 비단 천에 그렸다는 것부터 남다른 특별함이 느껴집니다.
쏘가리 그림도 인상 깊었습니다. 사임당 역시 여느 사대부가의 여인으로써 남편, 아들이 출세하기를 바랐을 거예요. 그 당시 출세라면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에 오르는 일이였겠지요. 그런 마음이 그림에 고스란히 담겨 있는 것 같습니다.
달개비와 추규를 그린 '제거 추규'에서는 화폭 하단 부분 왼쪽 끝에 말똥구리 두 마리가 말똥을 함께 굴리는 장면을 재밌게 표현했습니다. 곧 있으면 다음 장면에서는 사라지고 없을 곤충의 모습을 상상하게 하는 화가의 솜씨에 감탄합니다.
동양화는 비움의 미학이라 했던가?
사임당의 '수박과 개미취(서과자완 西瓜紫菀)'는 여백의 미를 느낄 수 있는 그림입니다. "저자는 많이 그리지 않고 여백이 넓어도 그림이 된다."라고 말합니다.
위 그림은 오죽헌시립박물관에 소장된 초충도입니다. 이전 초충도는 사물을 평면 위에 올려 놓았다면, 이 그림은 사물의 앞뒤로 자리 원근감이 표현해 한층 경지에 오른 그림으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메뚜기 왼쩍 뒷다리를 오른쪽 뒷다리보다 길게 그린 것, 나비의 날개도 앞 뒤로 자연스럽게 접혀 있어 어색함이 없고, 뒤로 갈 수록 오이를 작게 그려 사물크기로 공간을 표현했습니다. 색 표현에도 세련미가 덧보인다고 평가되는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사임당의 초중도가 평면성에서 입체성으로 들어선 그림으로 저자는 사임당의 초충도의 완성작으로 꼽고 있습니다.
풍요와 다산을 상징하는 가지와 산딸기 그림입니다.
이번 그림은 약간의 실망스런 그림으로 평가되는 그림입니다. 지금까지 사임당의 그림은 높은 예술적 가치로 평가를 받았는데 위 그림은 다소 미흡하게 평가되고 있습니다.
저자는 다른 그림에 비교 했을 때 생기가 부족하고 가지나 잎이 싱싱하지도 않고 줄기나 잎도 힘 없고 여백 또한 허한 구석이 많다고 평했습니다. 사마귀는 가지에 비해 너무 크고 나비 두마리는 이전 그림과 판박이라고 말합니다. 입체감, 딸기의 색상등도 기대에 못미쳤다는 다소 실망스러움을 감추지 않습니다. 사임당도 모든 것에서 완벽할 수는 없었을 인간이라는 사실이 새삼 느껴지는 그림입니다. 저자의 말을 듣고 보면 형식적인 그림으로 보이기는 합니다. 그래도 그림을 전혀 모르는 제 눈에는 보는 눈이 없어서인지 그냥 잘 그린 그림으로 보입니다. ㅋㅋㅋ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1부가 사임당의 그림과 매창의 그림을 소개하였다면 2부는 그동안 사임당에게 궁금했으나 물어보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가상의 대화방식 문답형으로 마치 인터뷰하듯 이야기를 나눕니다. 책 뒤쪽에 율곡, 사임당, 매창이 그 시대에 살았던 아들과 딸, 어머니로써 삶의 아픔과 기쁨, 그리움 등 삶의 애환을 담담한 이야기로 풀어놓습니다.
아래는 교보문고 소개란 내용의 일부를 발췌해 봤습니다.
이런 책은 서재에 꽂아두고 자주 꺼내 보면 좋을 책이네요. 친절하고 재미 있는 해설과 뒷쪽 이야기들이 생생해서 너무 재밌게 보았습니다.
책을 읽으면서 어린 시절 마당의 뜰을 떠 올려 보게 됩니다. 텃밭에 심은 가지와 오이, 뒤꼍에 포도 넝쿨, 작은 화단에 울긋불긋 봉숭아와 닭 벼슬을 닮은 맨드라미, 담장을 기어오르는 나팔꽃, 아지랑이 피는 봄날 나풀나풀 들꽃 주변을 맴도는 호랑나비, 그 시절 마당을 가득 채웠던 생명들이 새삼 그리워집니다. 심심할 때면 땅에 고개를 처박고 개미들의 행렬을 관찰하고 빨랫줄에 앉아 쉬고 있는 잠자리를 살포시 잡아보기도 했던 추억의 뜰은 기억 속에 그대로 있습니다.
가끔 이 기억 속의 뜰을 꺼내 보면 사무치게 그리운 사람이 떠 오릅니다. 마당 한편을 텃밭으로 일구어 채소를 심어 물을 주고 잡초를 뽑으며 하찮은 잡담을 나눴던 어린시절 내 어머니가 참 그립습니다.
어린 시절은 태어나고 병들고 늙고 죽는 것에 대한 자연의 순리 따위는 관심 밖이였습니다. 어머니와 딸의 일상적인 평온한 하루하루는 영원히 지속 될것만 같았지요. 세월이 흘러 나이를 먹어 우주 만물의 성장과 소멸은 자연의 순리이고 마땅한 이치임을 알게 됩니다. 꽤 긴 시간동안 어머니의 죽음은 머리로는 이해되지만 마음은 이해를 거부하였습니다. 어린시절 추억을 소환할 때면 내게 어머니는 늘 그리운 존재입니다. 이 책 속 율곡선생도 이른 어머니의 죽음을 아파하고 많이 그리워했네요.
우리 초연당의 정원은 제 유년시절 마당의 수백 배의 크기로 뜰이라 부르기에는 다소 난감하기도 합니다만 각가지 여러 식물들과 곤충들이 서식하고 있어 나름 자연을 느끼기에 좋은 곳입니다. 매화나무, 감나무, 사과나무, 앵두나무, 복숭아, 숲에서나 살 법한 야생화들, 들꽃, 들풀, 날곤충들이 서식하고 있습니다. 도랑에는 물속 수생물들이 가득합니다. 정말 생생한 생명의 속삭임을 듣고 느낄 수 있는 곳이지요. 사임당처럼 그림을 그리는 것은 무리지만 오늘도 이 아름다운 순간의 소중한 모습들을 핸드폰에 담고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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