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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는 장마를 어떻게 견뎠을까?

배솔 2026. 6. 23. 16:35
황매실원액

 

기상청의 장마기간 뉴스 장면입니다.[사진출처 : [날씨] 올해 장마 시작..내일 전국 '장맛비' / 연합뉴스Tv (YonhapnewsTV) 2023. 6. 25 ]


장마가 시작되면 우리는 기상청 앱을 켠다.

비 예보를 확인하고, 침수 지역을 검색하고,
제습기를 돌린다.

하지만 기상청도, 위성도 없던 조선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긴 장마를 견뎌냈을까.

흥미롭게도 그들은 제방을 보수하고 곡식을 비축하는 현실적인 대책과 함께,
왕이 거적때기 위에서 잠을 자고
국수를 금지하는 독특한 방법까지 사용했다.

오늘은 조선시대 사람들이 장마를 대했던 방식을 통해,
그들이 자연을 어떻게 이해했는지 함께 살펴보려 한다.

1
조선의 장마 대책


조선시대의 장마 대책을 이야기하면
많은 사람들이 먼저 기청제나 음양오행 같은 주술적인 풍습을 떠올린다.

하지만 실제 기록을 살펴보면 조선은 생각보다 매우 현실적인 방식으로 수해를 예방하고 대응하려 노력했다.

수방 자재 비축 및 제방 관리

영조가 수문 위에서 준천 공역을 관람하는 모습을 그린 ‘수문상친림관역도’. ‘준천계첩’에는 이 그림을 포함해 당시 공사 진행 상황을 표현한 그림 4장이 실려 있다.-사진제공 열화당 [사진및 각주 출처 : 동아일보 :240년 전 청계천 공사 어떻게 했나]



장마가 시작되기 전, 조선 정부는 봄과 가을 농한기를 이용해 저수지와 논둑, 수로를 미리 보수했다.
특히 물길이 막히면 작은 비에도 큰 피해가 발생했기 때문에 수로 관리가 매우 중요했다.


한양의 중심을 흐르던 청계천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조정은 개천 바닥에 쌓인 흙과 퇴적물을 주기적으로 걷어내 물길을 깊게 만들고,
수문을 점검하여 도성 안이 물에 잠기는 것을 막고자 했다.


<수해에 대비한 비축 제도>

관청에서는 돌과 흙부대, 가마니 등 제방을 보강하는 데 필요한 수방 자재를 상시 비축했다
. 오늘날 지방자치단체가 수해 대비용 모래주머니와 장비를 준비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이다.


만약 실제 홍수가 발생하면 국가는 곧바로 <구휼 체계>를 가동했다.

수해 지역의 세금을 감면하거나 징수를 미루었고,
곡식을 풀어 이재민에게 죽과 쌀을 지급했다.
또한 수해 뒤에 발생하기 쉬운 전염병을 막기 위해 의원을 현장에 파견하기도 했다.


오늘날의 기준에서 보면 부족한 점도 많았겠지만,
적어도 장마와 홍수를 단순히 하늘의 뜻으로만 받아들이며 손을 놓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조선 사람들은 제방을 쌓고 물길을 정비하며 백성을 구제하는 현실적인 노력을 기울였고,

동시에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자연을 이해하려 했다.

2
비가 그치지 않자

왕은

거적때기 위로 내려왔다



제방을 정비하고 물길을 관리하는 것만으로 해결되지 않는 장마도 있었다.
비가 한 달 가까이 이어지고, 강이 범람하며,
백성들의 삶이 무너질 정도의 대홍수가 발생하면

조선의 왕들은 또 다른 방식으로 재난에 대응했다.

조선은 유교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한 사회였다.
당시 사람들은 하늘과 인간 세상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믿었으며,
이를 '천인감응설(天人感應說)'이라고 불렀다.


기우제 등록 조선후기 예조에서 1636년부터 1889년까지 기우제를 지낸 것에대하여 기록한 등록. [사진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하늘은 단순한 자연현상이 아니라 인간의 행동에 반응하는 존재였고,
특히 나라를 다스리는 임금의 덕과 정치가 하늘의 뜻과 연결되어 있다고 여겨졌다.

그래서 장마가 오랫동안 계속되면 왕은 먼저 자신의 잘못을 돌아보았다.

감선(減膳)

대표적인 행동이 '감선(減膳)'이었다.
왕은 수라상에 오르는 음식의 수를 줄이고 고기 반찬을 끊으며 스스로를 경계했다.
백성들이 수해로 고통받고 있는데 임금만 풍족한 식사를 할 수 없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더 심각한 상황이 되면 왕은 '피전(避殿)'을 행했다.
화려한 궁궐의 침소를 떠나 처마 밑이나 좁은 공간에서 생활하며
자신의 책임을 되새기는 의식이었다.

실록에는 왕이 거친 거적때기 위에서 생활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성종 때 대홍수가 발생했을 때 신하들은 임금의 건강을 걱정하며 다시 침소로 돌아갈 것을 청했다.
그러나 성종은 백성들이 집을 잃고 비를 맞고 있는데
자신만 편안히 지낼 수 없다며 이를 거절했다고 전해진다.

구언(求言)

왕은 '구언(求言)'이라는 교서를 내려 신하들에게 자신의 잘못을 숨김없이 지적해 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정치의 실패는 없는지, 백성들을 힘들게 한 정책은 없는지,
조정에 부패는 없는지를 공개적으로 묻고 비판을 받아들였다.

현대인의 눈에는 비가 많이 온다고 왕이 밥을 줄이고
거적때기에서 자는 행동이 다소 낯설게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당시 사람들에게 이는 단순한 의식이 아니라,
재난의 책임을 가장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 먼저 짊어지겠다는 정치적 선언에 가까웠다.


3
국수를 금지하고
시장의 지붕을 걷어내다


장마가 길어져 비가 그치기를 비는 기청제(祈晴祭)가 열리면
조정은 다양한 금기와 조치를 시행했다.

현대인의 눈에는 다소 낯설고 때로는
황당하게 보일 수도 있는 내용들일것이다.
대표적인 것이 국수 금지였다.

당시 사람들은 길고 가늘게 늘어진 국수 가락이
하늘에서 내리는 빗줄기와 닮았다고 생각했다.

사진출처 : 잔치국수 (나무위키)

음양오행적 사고에서는 형태가 비슷하면 기운도 서로 통한다고 여겼기 때문에,
비를 연상시키는 국수를 만들거나 먹는 행위를 삼가기도 했다.


시장에 설치된 천막이나 차일을 걷어내는 일도 있었다.
조선 사람들은 그늘을 음(陰)의 기운과 연결지어 생각했다.
이미 장마로 세상에 음기가 가득한 상황에서 시장의 지붕이 또 다른 그늘을 만든다고 여겼던 것이다.
반대로 하늘을 가리지 않고 열어 두어야 양(陽)의 기운이 들어올 수 있다고 믿었다.


이 밖에도 마당에 물을 뿌리며 청소하는 일을 삼가거나,
일부 지역에서는 도축을 제한하는 등의 조치가 이루어지기도 했다.
오늘날의 과학으로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은 아니지만,
당시 사람들은 자연과 인간 사회가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고 믿었기에 매우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어쩌면 이러한 모습은 지금 우리의 모습과 완전히 다르지만은 않다.
시험을 앞두고 미역국을 피하거나 찹쌀떡을 선물하는 것처럼,
인간은 불확실한 상황 앞에서 작은 행동에 의미를 부여하며 마음을 다잡아 왔다.

노처녀와 노총각 결혼 시키기

[사진출처: 조선시대도 저출산 걱정... 혼기 놓친 양민에게 500냥 지원 I 동아일보]


조선시대 사람들은
장마나 가뭄 같은 기상이변이
음양의 균형이 무너졌기 때문에 발생한다고 생각했다.

남성은 양(陽), 여성은 음(陰)을 상징한다고 보았는데,
혼기가 지난 남녀가 결혼하지 못한 채 늘어나면
그들의 원망과 한(恨)이 세상에 음기를 만들어낸다고 믿었다.

그래서 장마가 길어지거나 기상이변이 계속되면
지방 관청에서는 노총각과 노처녀를 조사하기도 했다.
특히 가난 때문에 혼인을 하지 못한 경우에는
관청에서 혼수품과 비용을 지원해 주었고,

부모가 없는 고아의 경우에는
수령이 직접 혼주 역할을 맡아 결혼을 주선하기도 했다.

4
그들은 왜 이것을
진지하게 믿었을까



현대인의 눈으로 보면 조선시대의 장마 대책 중 일부는 다소 비과학적으로 보인다.
왕이 거적때기 위에서 잠을 잔다고 비가 그치는 것도 아니고,
국수를 먹지 않는다고 하늘이 개는 것도 아니다.
노총각과 노처녀를 결혼시킨다고 장마가 끝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렇다면 조선 사람들은 왜 이러한 행동을 진지하게 받아들였을까.

그 이유는 당시 사람들이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 자체가 오늘날과 달랐기 때문이다.

[사진출처 : 음양오행설 위키백과]


조선 사회를 지배하던 유교와 음양오행 사상은 인간과 자연을 분리된 존재로 보지 않았다.
하늘과 땅, 인간은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어느 한쪽의 균형이 무너지면 다른 곳에도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했다.
이를 설명하는 대표적인 개념이 바로 '천인감응설(天人感應說)'이다.

천인감응설에 따르면 자연재해는
단순한 기상 현상이 아니었다.

그것은 하늘이 인간 사회에 보내는
일종의 경고이자 신호였다.

왕이 정치를 잘못하거나 사회의 질서가 무너지면
하늘은 가뭄이나 홍수, 지진과 같은 재해로 응답한다고 여겨졌다.

오늘날 우리는 장마의 원인을
대기 흐름과 기압 배치에서 찾는다.

하지만 기상위성도, 레이더도 없던 시대의 사람들에게는
다른 방식의 설명이 필요했다.

음양오행은 당시 사람들이 가진 가장 체계적이고 설득력 있는 세계 해석의 틀이었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단순히 미신을 믿었다는 사실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자연재해를 개인의 문제가 아닌 공동체 전체의 문제로 이해했다.

왕은 자신의 책임을 돌아보았고,

관청은 백성을 구휼했으며,

사람들은 일상의 행동까지 조심하며 재난을 함께 견디고자 했다.

장마를 바라보는 방식은 현대와 달랐지만, 재난 앞에서 공동체가 함께 책임을 나누어야 한다는 생각만큼은 지금도 낯설지 않다.

5.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무엇일까

초연결 사회 픽토그램 [사진출처: 초연결사회, 산업 전체 가치사슬의 '스마트화' 필요 ㅣ 산업일보]


조선시대 사람들의 장마 대책을 살펴보면
웃음이 나오는 부분도 있다.

국수를 금지하고, 시장의 지붕을 걷어내고,
비를 멈추기 위해 결혼을 장려했다는 이야기는
현대인의 눈에는 다소 엉뚱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기록을 읽다 보면
그 행동들보다 그 들이 당연하게 공유했던 생각들이 보이는 것 같다.


장마가 계속되면 왕은 자신의 책임을 돌아보았고,

국가는 굶주린 백성을 구휼했으며,

한 사람의 외로움조차 공동체가 함께 해결해야 할 문제로 여겼다.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면
비효율적이고 비과학적인 방식도 많았지만,
적어도 그들은 인간과 인간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믿었다.

스마트폰과 초고속 인터넷으로 전 세계가 연결된 지금,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사람들과 소통한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외로움과 고립은 오히려 더 큰 사회문제가 되었다.

옆집에 누가 사는지 모르는 일은 더 이상 특별한 이야기가 아니다.
누군가의 아픔은 실시간으로 화면에 전달되지만,
그 슬픔이 나의 문제로 이어지는 경우는 드물다.

물론 조선시대로 돌아갈 수는 없다.
또한 돌아가서도 안 된다.
우리는 과학과 기술을 통해 더 안전하고 풍요로운 세상을 만들었다.

다만 가끔은 그런 생각이 든다.
장마가 내리면 모두가 같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함께 걱정하고,
누군가의 고통을 공동체 전체의 문제로 받아들이던 마음.

자연과 인간, 그리고 인간과 인간 사이에 보이지 않는 연결이 존재한다고 믿었던 감각 말이다.

어쩌면 우리가 조선시대의 낯선 장마 대책에 흥미를 느끼는 이유도 그 때문인지 모른다.
비를 멈추는 방법이 아니라, 함께 견디는 방법.

그 기록 속에는 오늘날의 우리가 잠시 잊고 지내는 어떤 온기가 남아 있다.



조선 사람들은 같은 하늘 아래 살고 있다고 믿었다. 그 믿음이 옳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나는 우리가 살아가며 만나는 저마다의 장마를 조금 더 함께 견뎌낼 수 있기를 바래보며 글을 맺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