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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주 ① - 한국 술 전통주의 역사

초연당웹지기 2021. 3. 25. 01:43
황매실원액

 

어쩌면 술은 인간의 역사가 시작 될 때부터 함께 해 온 것 일지도 모릅니다. 잘익은 과일이 땅에 떨어져 그것이 자연 발효되어 알콜성분을 지닌 술이 되었다는 설로 미루어 볼 때, 술의 기원은 아득히 먼 옛날부터였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지구상의 모든 민족들과 마찬가지로 우리 민족 역사도 술과 함께 해 왔습니다. 술은 신과의 접신 할 때도 필요했고, 인간의 사회생활에도 빠지지 않았습니다.
인류 역사에서 술은 과일주에서 시작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과일은 그냥 내버려 두어도 술로 바뀝니다. 과일에 과즙이 껍질에 있는 천연효모와 작용하여 과즙 속 당분이 알코올과 이산화탄소로 분해되어 술로 바뀌는 것입니다.

과일 먹는 원숭이

 

선사시대

술의 기원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합니다. 그 중 하나가 원숭이를 보고 배웠다는 설인데요. 원숭이가 먹다 버린 과일을 며칠 후에 다시 주워 먹는 것을 보았는데 원숭이가 기분이 좋아져 뛰어노는 것을 보고 발효의 원리를 배웠다는 설입니다.
한반도를 살펴보면 술의 역사는 신석기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신석기 시대의 빗살무늬 토기에는 고대의 술 문화를 가늠할 만한 요소가 있습니다. 토기의 빗금은 비, 햇살, 바람 등을 나타내는 무늬로 모두 발효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자연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발효에 대한 기본적인 개념이 정립된 후에는 미인주 형태의 술이 나타났을 것으로 추측합니다. 미인주는 누룩이 개발되기 전 시기로 쌀이나 밥을 당화과정을 입속의 침을 통해 인위적으로 진행하는 것입니다. 여인들이 밥을 씹어 뱉어낸 것에 물을 넣고 토기에 담아 발효를 시킨 초기의 술의 형태라 할 수 있습니다.
이렇듯 농경시대가 되면서 곡식으로 빚은 곡물 양조주가 생겨났을거예요. 우리 선조들은 포도주와 같은 과일주 보다 곡물주를 생산해 마셨습니다. 스스로 발효가되어 술이 되는 포도주와는 달리 곡물주는 전분을 당화(糖化)하는 과정과 알코올로 발효하는 과정을 거쳐야지만 술이 됩니다. 우리 조상들은 이렇듯 곡물에 대해 해박 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고대국가

우리나라의 선사 또는 상고시대 문화는 우리의 문헌의 기록이나 고고학적 유물이 없어 주로 중국 문헌을 통하여 살펴볼 수 있습니다.

중국 고대문헌에 따르면, 중국 서진시대 진수(233~297년)가 편찬한 『삼국지』 「위지 동이전」의 한반도 일대 고대 국가에 대한 기록 속에 술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문헌에 따르면 '부여는 은정월 12월에 영고, 고구려는 10월에 동맹, 동예는 10월에 무천이라는 제천 의식을 거행했는데, 이때 춤추고 노래하고 술 마시고 즐겼다'고 전합니다. 또한 '마한에서는 5월에 씨앗을 뿌리는 큰 모임이 있어 춤과 노래와 술로써 즐겼고, 10월에 추수를 끝내면 역시 이러한 모임이 있었다'고 합니다.

「위지동이전」의 무천에 관한 기록 |   출처 : 서울특별시 광진구 고구려 제천의식 동맹제 재연행사

 

고구려 건국신화 「동명왕편」에도 술 이야기가 나옵니다. '천제의 아들 해모수가 하백의 딸 유화를 술 취하게 하여 아내로 삼아 주몽을 낳았는데, 주몽은 훗날 고구려를 건국한 동명성왕이 되었다. ' 이 신화는 고려시대 이규보가 작성한 『동국이상국집』(1241년)과 이승휴의 『제왕운기』(1287년)에 실려 있습니다.

고구려의 3대 왕인 대무신왕은 국내성을 침략해온 한나라 장수에게 잉어와 지주(旨酒)를 보내어 물러가게 했습니다. 백제 2대 왕인 다루왕은 흉년이 들자 금주령을 내렸고, 30대 왕인 무왕은 신하들과 더불어 백마강 가에서 술을 마시며 북을 치고 춤을 추며 놀았다고합니다. 신라 3대 왕인 유리왕은 경주의 여자들을 두 패로 나누어 길쌈 경쟁을 시켰는데, 이때 진 편이 술과 음식을 장만해 이긴 쪽에게 사례하며 서로 더불어 노래하고 춤을 추며 놀았다는 얘기도 있습니다.

이렇듯 삼국시대 이전부터 한해의 풍성한 수확과 복을 기원하면 맑은 곡주를 빚어 조상께 먼저 바치고 춤과 노래와 술마시기를 즐긴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 고구려는 발효의 나라라 불릴 만큼 훌륭한 술과 앞선 장 담그기 기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제천행사에는 술이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데 당시에 술이 신과 인간의 소통을 위한 신성한 제물 역할을 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또한 앞서 언급한 「위지 동이전」에도 ‘고구려 사람은 발효를 잘한다’고 기록돼 있고, 송나라 때 이방이 편찬한 『태평어람』에는 곡아주가 ‘고구려에서 유래되었다’는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이는 고구려에서 빚은 곡아주를 통하여 술을 교역의 중심으로 활용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고대시대 술관련 벽화
이승휴 제왕운기 | 장독이 나오는 그림 -고구려 안악 3호분 벽화

 

삼국시대

712년에 작성된 일본의 『고사기』에는 술을 잘 빚었던 백제인 인번(仁番)의 기록이 있습니다. 인번은 새로운 양조법으로 미주(美酒)를 빚었고, 이 향기로운 술을 마시고 감동한 응신천황(應神天皇, AD27~312)의 노래가 수록되어 있다고합니다. 이 때 이미 백제인 술 빚는 수준이 상당이 높았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는 또한 백제의 술 양조 기술이(누룩) 일본에 전해졌음을 알 수 있는 근거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신라주 맛이 중국 당나라 풍류객 들에게도 좋기로 소문이 났고, 당나라 시인 이상은(李商隱, 812~858년)은 “한 잔 신라주의 기운이 새벽바람에 쉬이 사라질까 두렵구나”라고 시를 읋기도 했습니다.

이렇듯 고대와 삼국시대, 통일신라시대에 걸쳐 술에 대한 많은 이야기가 전해져 오고 여러 관련 유물들이 출토되었지만 안타깝게도 그 시대에 마시거나 빚어졌던 술의 구체적인 이름이나 제조방법은 전하는 것이 없습니다.

고구려 벽화 접객도
고구려 접객도 | 국보 제91호 기마인물형도기 (신라 왕실의 주전자) ,사진은 모조품

 

고려시대

이미 삼국시대에 곡식을 가지고 만든 곡주에도 막걸리가 아닌 청주가 있었던 것으로 추측합니다.
고려시대에 이르면 이전부터 내려오던 곡물주의 양조법이 발달하고 증류법이 도입되면서 청주, 탁주, 소주의 기본적인 술 문화가 발달합니다.

고려시대에는 중국의 송, 원의 양조법이 도입되었으며, 전래의 주류 양조법이 발전되어 국(누룩)의 종류도 소맥국(小麥麴)과 미국(米麴)으로 이루어질뿐 아니라 주품(酒品)도 다양해졌습니다. 고려사에 의하면 고려 문종(1046년)때 왕이 마시는 술은 양온서(釀醞署)를 두어 빚어졌는데 청주와 법주 두종류로 구분되어 질항아리(유약을 바르지 않은 옹기)에 넣고 명주로 봉하여 저장해 두었다합니다.
청주(淸酒)는 한자 그대로 풀이하면 맑은 술로서 탁주인 흐린 술과 크게 대조되어 구별됩니다. 동국이상국집의 시 속에 『발효된 술덧을 압착하여 맑은 청주를 얻는데 겨우 4~5병을 얻을 뿐이다』라 하였습니다.
따라서 고려시대에는 발효된 술덧을 압착하거나 걸러내어 맑은 술을 빚었고 이미 덧술법도 사용하여 알코올 농도가 제법 높은 청주를 빚었을 것입니다. 발효가 끝난 술덧을 잘 걸러 내어서 부드럽게 마실 수 있는 맑은 술이 청주라는 이름으로 불리웠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청주 vs 탁주

우리나라에증류주인 소주가 전래된 것은 몽골의 침략기인 충렬왕(재위 1274~1308년) 때입니다. 『고려사』 우왕 원년(1375년)의 기록에 “사람들이 검소할 줄 모르고 소주나 비단, 금이나 옥그릇에 재산을 탕진하니 앞으로 일절 금한다”고 한 것으로 보아 당시 소주가 제법 널리 퍼져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고려시대에는 국가 행사로 치러진 대규모의 불교행사 팔관회에도 술이 등장합니다. 술 빚는 기술이 발달하고 교역이 활발해지면서 나라의 행사나 잔치에 쓰일 술을 빚는 대규모 양조장이 출연했습니다. 이때 대규모 양조장의 역할을 하던 것이 다름 아닌 고려 시대 사원이었습니다. 불교가 발달하면서 각종 사원이 생겨났고 비교적 쉽게 노동력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을거예요. 고려말 사원장원이 발달했을 때는 전국의 유명사찰마다 대규모 양조장이 존재했고 많은 사찰에서 누룩을 만들어 팔았다고 합니다.

고려말 문인들의 시문 속에 구체적인 술 이름이 많이 등장합니다. 술을 소재로 삼은 「한림별곡」에는 황금주, 백자주, 송주, 죽엽주, 이화주, 오가피주 들이 등장합니다. 술을 의인화한 해학적인 한문 소설로 임춘의 『국순전』, 이규보의 『국선생전』도 쓰여졌습니다.

고려시대의 유산으로 첫손에 꼽히는 것이 고려청자입니다. 고려청자로 만들어진 술병과 술잔에 대한 연구와 분석을 통해서 고려시대 술 문화를 풀어낼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고려청자 술주전자
청자자상감국화문탁잔 | 국보 제116호 청자 상감모란문 표주박모양 주전자 |보물 1930호 청자 퇴화 초화문 표주박 모양 주전자 및 승반

 

조선시대

조선시대는 집집마다 술을 빚는 가양주문화가 있었으며 우리 술 문화의 전성기입니다. 우리나라 주조사상은 조선시대에 오면서 지금까지 유명주로 손꼽히는 술들이 이 시기에 정착되었습니다.
남부지방에서는 탁주, 중부지방에서는 약주, 북부지방에서는 증류주가 발달하였습니다.

조선 시대 선비들은 시와 문장 짓는 것을 기본 교양으로 여겨서 생활 속에서 술을 자연스럽게 즐겼습니다. 선비들은 시회를 열어서 술잔을 기울이며 시를 짓기도 했고, 취흥을 바탕으로 영감을 얻어 술을 사랑하는 마음을 문학과 그림으로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예부터 술 마시는 풍류를 생활 속에서 자연스럽게 즐기며 취흥을 예술로 승화시켰습니다.

술을 약으로 생각하여 약재를 넣은 술이 개발되고, 이때 술은 고급화 추세를 보여 제조 원료가 맵쌀에서 찹쌀로 바뀌고 발효 기술도 한 번에 술을 빚는 단(單)담금에서여러 차례 발효과정을 거치는 중양법(重醸法)으로 바뀌면서 양보다 질 좋은 술들이 제조 되었습니다. 이 때 혼양주기법도 생겨나는 등 양조기법이 다양하게 발달했습니다. 또한 꽃이나 과일, 열매 등 자연재료가 갖는 향기를 첨가한 가향주도 발달하였습니다.

조선시대의 『임원십육지』에는 꽃잎이나 향료들을 이용하여 빚은 약주를 향양주(香釀酒)라 하였으며 송화주, 두견주, 국화주, 호산춘, 송순주 등이 있습니다. 이렇듯 조선시대 술 양조법이 발달하고 술 종류가 많았던 것은 이 당시 양반가의 가장 중요한 일이 ‘봉제사 접빈객’이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접빈객을 당연히 갖추어야 할 예로 생각하였고 제사를 모시고 손님을 접대할 때에는 직접 음식과 술을 장만하며 정성을 다하였습니다. 또한 각종 의례는 및 제사상에는 기본으로 갖춰져야 했던 음식으로 조상에게 절을 할 때마다 술을 따라 올렸습니다.

왼쪽 호산춘  |  오른쪽 출처 - 충청투데이 '남북 평화의술' 당진 면천 두견주

 

조선시대에는 증류식 소주가 등장하면서 고려시대의 공식적으로 빚어오던대규모 양조형태의 술이 이제는 집집마다 소량의 술을 빚는 가양주 형태로 바뀌었습니다. 당시의 소주는 지금과 같이 희석식 소주가 아닌 증류식 소주였습니다. 이는 많은 양의 곡물을 필요로 했는데 술에 대한 폐해를 지적하는 많은 상소와 곡식 부족에 대한 문제가 끊임없이 제기되자 제사용과 손님 접대용으로만 허용하고 원칙적으로 술을 금하는 금주령이 내려졌습니다.

조선후기에 와서는 지방주가 전성기를 맞이했습니다. 이때의 명주로는 서울의 약사춘, 여산의 호산춘, 충청의 노산춘, 평안의 벽향주, 김천의 청명주 등이 유명한 술들입니다. 이렇게 다채로운 술들이 개발되기도 하였고, 외부에서 외래주가 많이 유입되었던 시기이기도 합니다. 19세기 조선말에는 국제화시대로 접어들게 됨에 따라 외국과의 정보교환이 쉬워지면서대마도를 통하여 일본, 중국 등에 수출을 많이 하였습니다. 그 당시 우리나라는 자가제조가 허용되어 자유로이 발전되었으나, 중국은 국가가 제조를 관장함에 따라 우리 술의 수출이 용이하여 더욱 발전될 수 있었습니다.

조선의 가양주 문화 | 증류된 소주를 받는다

 

대한제국(일제 강점기)

19세기 조선말에는 일제가 주류에 조세를 부과하기 위해 만든 주세법이 생기기 이전에 자가제조 및 판매가 자유로웠던 관계로 술도 다양화 되고 주세법 창설 당시 제조장수는 무려 155,632개소나 될정도로 번성하였습니다. 1907년 7월에 조선총독부령에 의한 주세법이 공포되었고 같은해 8월에 시행령이 공포되면서 우리나라 조선 전통주(전래주)는 하락하기 시작했으나 그래도 몰래 밀주가 성행하였습니다. 그러자 일제는 1916년 1월에 주류단속을 강화하고 모든 주류를 탁주, 약주, 소주로 획일화시켰습니다. 1917년 부터는 주류제조업의 정비가 시작되면서 조선의 자가양조는 전면적으로 금지되었고 1920년을 기점으로 신기술이 도입되어 재래식 누룩을 사용하던 양조방법에서 일본의 흑국, 황국의 배양균을 사용하는 양조법으로 바뀜과 동시에 전통주는 대부분 맥이 끊기게되었습니다.
앞서 포스팅한 간장양조 역시 1920년을 기점으로 일본의 국균인 황국균을 배양해 양조하는 왜양조장이 부산 일대에 많이 들어왔습니다. 현재 대량 생산으로 시판되고 있는간장들은 이 때 들어온 일본의 황국균을 배양해 양조한 간장이 대부분입니다.

이렇듯 한말 이후 외세의 문화통치 압력으로 쇠락하기 시작하는 우리 전통주 문화는 일제강점기에 그 맥이 끊어져버리고 우리의 술도 점차 사라지게 됩니다. 광복 이후에도 우리 술 문화를 복원하고자 하였지만 각 집안에서 구전으로만 비법을 전해오는 방식으로 이어져 왔기 때문에 쉽게 복원되지 못하였습니다. 1980년대에 이르러서야 전통주 발굴이 이루어지고, 전통주를 무형문화재로 지정하고 순 우리의 재래식 전통주의 맥을 다시 살려보려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일제 강점기 가양주 금지  | 일제강점기 때 양조장 모습 출처:산사원

 


우리 국민 대부분은 우리 술의 가치와 중요성을 인정하지만 우리 술을 제대로 아는 사람들은 많지 않습니다. 특히 우리의 술에 대해 그리고 술과 함께 이루어지는 우리 음식문화에 대해 제대로 즐기는 법을 알지 못합니다. 현재 우리나라는 세계적인 술 소비국 중 하나이면서 외국 술인 사케나 위스키나 맥주, 와인의 최대 수입국입니다. 심지어 해박한 와인지식을 자랑하면서도 우리의 전통 술 문화를 모르는 것에 대해서는 부끄러워하지 않는 실정입니다.

최근 세계적으로 K-Pop 열풍에 힘 입어 한국스타일과 한식에 관심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K-Food의 열풍으로 발효식품 김치나 된장 고추장 그리고 막걸리등 외국인들에게 한식은 건강식품으로 각광을 받기 시작하였습니다. 이제는 외국인들이 아닌 우리 스스로가 우리의 술 문화를 바로 알고 전통주가 더욱 사랑받는 국민 술로 거듭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토종 누룩을 이용한 전통 양조법을 되찾고, 우리 고유의 맛 역시 찾아야하지 않을까요?

막걸리와 소주